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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4 16:48
<6·10 민주항쟁을 되새기며>
 글쓴이 : 큰바위
조회 : 1,226  
1987년 4월, 느닷없이 전국 초등학교까지 비상 교직원회의를 소집했다. 각 학교 교장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유사 이래 듣도 보도 못한 지시를 내린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두 명씩 조를 짜서 각각 마을을 방문하라는 것이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한 가정 방문이 아니라, 마을 회관에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른바 '4.13 호헌 조치'의 불가피성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라는 것이다. 한편 교직 2년차 햇병아리 교사는 벌떡 교사가 되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였으나, 그저 성실한 교육자였던 교장은 어쩔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결국 나이가 많으신 선배 교사들은 성실(?)하게 마을 방문을 나가고, 젊은 교사들은 마을 대신 막걸리 집에 주저앉아 분노와 걱정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교육계에서도 1986년 5·10 '교육민주화 선언'의 열기를 이어나가며 교육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각 지역의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함께 참여하고 있던 터였다. 낮에는 조심조심(?) 수업을 하고, 저녁이면 뜻을 함께 하는 교사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며 울분을 삭혔다. 그러던 중, 1987년 6·10 국민 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게 된다. 명동 성당 투쟁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하루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벌이는 시위가 계속되면서 이른바 6월 민주 항쟁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끝내 6·29 선언을 이끌어내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민주 진영의 분열과 양김 단일화 실패로 인해 그 빛은 바래고 만다. 현수막과 피켓을 그러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가행진의 대열에 섰던 그날이 아득하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자유가 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우리의 민주가 강물처럼 흘러 넘친다면, 까짓 그날의 함성쯤이야 역사책 속으로 사라지면 또 어떠랴.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저 역사의 벽장 속에 모셔두었던 민주 항쟁의 깃발과 횃불을 다시 들어야 할 위태한 길을 가고 있으니, 그것이 분하고 안타깝다.정근희 올림.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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